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타 제국 (문단 편집) === 분열과 몰락, 영국과의 전쟁 ===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가에크와드, 신데, 홀카르, 본슬레 등 다섯 세력들로 나뉘어 서로 간에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영국은 페슈와 및 신데 가문과 군사동맹을 맺은 후 마라타 연합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1802년 10월 디왈리 축제 기간 중에 홀카르가 페슈와, 신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페슈와 바지라오 2세[* 라구나트라오의 아들로 1795년 전대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가 꼭두각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 후 페슈와직 승계. 마라타의 마지막 페슈와.]가 영국군과 군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곧이어 신데와 본슬레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데('''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전쟁 초기 1803년의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동년 12월 본슬레와 신데는 차례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이탈한다. 전쟁 도중 신데 가문의 세력권에 있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하였으며(1803년의 델리 전투),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홀카르 세력의 지도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1804년 초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7월 무쿤드와라 고개의 전투에서 야슈완트라오는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9월까지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마침내 10월 8일, 홀카르군은 영국 지배하의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공격하나, 영국군의 기습에 당해 큰 타격을 입고 패배한다.[* 그러나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아직 살아있었다!)는 홀카르의 지휘관 야슈완트라오 홀카르의 무용을 극찬하고 명예로운 칭호를 내렸다.] 이를 기점으로 전황은 홀카르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야슈완트라오는 홀카르의 동맹 바랏푸르 왕국[* [[자트족]] 정권으로, 델리 근교 바랏푸르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시대에 한 자트족 자민다르의 영지가 독립성을 띠기 시작하여 1724년에는 바랏푸르에 성을 쌓고 독립 왕국으로 기능하기에 이른다.]의 영토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를 추격한 영국군은 1805년 1월 바랏푸르 왕국의 수도 바랏푸르를 포위하였지만, 홀카르-바랏푸르 연합군의 호수비로 패배한다.[* 마라타 멸망 후 1826년에 영국군이 재침하였을 때는 바랏푸르 성이 함락 후 파괴된다.] 부담을 느낀 바랏푸르 왕국은 동년 4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을 이탈하였으나, 야슈완트라오의 선전은 북중부 인도 전역에서 추종자를 낳았고 신데와 본슬레는 재참전 채비를 하였으며, 자이푸르 왕국과 마르와르 왕국도 홀카르를 지원하였다. 바랏푸르에서 철퇴한 야슈완트라오는 시크 왕국으로 가서 시크의 란지트 싱을 끌어들여 영국에 대항하기를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지원을 약조하였던 란지트 싱은 곧 배반하고 영국 측으로 돌아서게 된다(1805년 12월). 군사적으로는 이처럼 홀카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나, 야슈완트라오의 분전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영국에 엄청난 전비 부담을 안겼으므로, 영국 총독 리처드 웰즐리[* [[아서 웰즐리]]의 형]가 본국으로 강제 소환되고, 영국 측은 야슈완트라오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이에 야슈완트라오가 응하여, 1805년 12월 24일 펀자브의 라지가트에서 '''라지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홀카르-영국의 무승부 형태로 마무리된다. 1806년 초에는 라지가트 조약이 개정되어 홀카르 피점령지가 반환됨으로써 홀카르는 군사적, 외교적 명예를 얻었으나, 전 마라타의 입장에서는 패배였고, 이후 마라타는 라자스탄 일대의 라지푸트족에 대한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다. 여전히 내부분열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페슈와와 가에크와드는 영국에게 협조하는 상태였고[* 가에크와드는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며, 그 와중인 1805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마라타의 주요 세력 중 가장 먼저 영국에 의해 보호국화되었다.] 신데와 본슬레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기에 독립 세력으로 남은 것은 이제 홀카르 세력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야슈완트라오의 사망 후 정체기를 겪는 중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 정책이 노골적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마라타인들의 반영 감정이 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17년 6월 13일 페슈와 바지라오 2세에게 사실상 마라타의 [[인도 번왕국|번왕국]]화를 의미하는 불평등조약인 푸네 조약을 강요해 성사시키고, 덤으로 페슈와의 기병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페슈와는 홀카르, 신데, 본슬레 및 라자스탄 세력까지 끌어들여 1817년 11월 5일 영국군을 선제 공격하게 된다(카드키 전투). 이것이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 ~ 1818)'''의 시작이다. 하지만 유럽의 싸움을 정리하고 이미 강할 대로 강해져버린 영국 앞에서 마라타군은 연전연패하였으며 마라타 연합군 내부의 이반도 속출하였다. 신데가 1817년 말 영국 측에 다시 붙었으며, 1817년 말의 전투에서 본슬레(시타바르디 전투)와 홀카르(마히드푸르 전투)가 영국군에 패배를 겪고 1818년 초 따로 강화를 맺어 번왕국화되었다. 라자스탄 역시 전쟁 도중 마라타와 반목하고 영국에 붙게 된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와 장군 바푸 고칼레는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818년 1월 1일의 코레가온 전투[* 별도로 이 전투에서는 영국군에 지원한 불가촉천민들이 마라타의 귀족 장군들을 죽임으로써 [[카스트 제도]]에 저항했다. 2018년 1월 1일 푸네에서는 코레가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서 불가촉천민과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충돌하였다: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8/jan/03/commemoration-of-british-military-victory-sparks-riots-in-india] 등에서 패배하고, 이어진 2월의 전투에서 바푸 고칼레는 페슈와를 지키다가 사망한다. 페슈와는 4개월 가량 더 추격전을 벌이다 결국 힘이 다함을 자각하고 영국에 항복한다. 바지라오 2세가 이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공식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현재의 [[칸푸르]] 주변 칸푸르 현에 속함)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과거 신데-홀카르의 지배 하에 있던 라지푸트 왕국도 1818년 말까지 번왕국화됨으로써 마라타의 구 영토는 전부 영국의 손 안에 들어간다. 명목상의 왕이었던 차트라파티 프라타프 싱 세력은 전쟁 와중에 영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 영국 지도 하에 구 차트라파티를 왕으로 하는 사타라 번왕국이 수립되었으나, 프라타프 싱의 아들(정확히는 양자) 샤하지가 아들 없이 1848년 사망함으로써 1849년 사타라 번왕국의 영토는 영국 직할령으로 흡수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